이정임. 사건적 특이. , 창조 4. 책은 혼자 쓰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둘이서 책을 쓰는 이유는 이러한 차원에서 설명된다. 개념적 인물들” 참조이다.5) Gilles Deleuze, 뿌리와 같은 위계화된 체계와 달리 지정된 점이나 위치가 없다. 오히려 개인은 엄격한 비개인화(비인격화) 연습을 거쳐, 탈영토화,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서로 관계맺음 속에서 변화·생성하는 <비평행적 진화>가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것이 동일자로부터 구성된 것(주체화)이 아니라, 자본, 『대담1972-1990』(Pourparlers 1972-1990), 1993, “그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같은 강도적인 다양성의 “순간적 포착”으로서의 이름, 다양체는 구체적인 질로서 존재한다. 이 개별자들은 각각 “특이성”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개인일 수도 있고 둘일 수도 있으며 어떤 사건을 구성하는 집단일 수도 있다. “주체”라는 말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허상적인 것일뿐더러 질적 특이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3) 선과 개별자의 내재성 ......
맑스의 현대적 변형-들뢰즈·가타리 철학을 중심으로
현대적 변형을 일으킨 맑스의 사상을 분석한 리포트입니다. 맑스의_현대적_변형12
1. 들어가며
2. 맑스의 인간관
1) 유적 존재
2) 관념론에 대항하는 니체와 맑스의 유물론
3) 전면적 인간
4) 산업적 인간
3. 개별자의 생산성 -들뢰즈·가타리 철학-
1) 서양의 사유체계를 지배해온 <나무>유형 -초월성-
뿌리-나무 체계
어린뿌리 또는 수염뿌리 체계
리좀(rhizome)
2) 리좀/ 개별성과 주체의 차이
3) 선과 개별자의 내재성
존재적 감수성과 문화적 감수성, 자본, 주체화
개별자의 생산성, 탈영토화, 창조
4. 맑스의 목적론과 고원
2) 리좀/ 개별성과 주체의 차이
미리 설정된 연결들만 존재하는 위계적인 나무 형태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다. 다양체는 연결접속을 늘림에 따라 반드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다. 이렇게 새로운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여기에는 통일적 단위도 보편성도 필요 없다. 다질적인 실재들만이 있을 뿐이다. 리좀 모양의 다양체들은 주체, 객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내적 규정, 크기,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즉, 다양체는 구체적인 질로서 존재한다. 질적으로, “그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주체”라는 말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허상적인 것일뿐더러 질적 특이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둘이서 책을 쓰는 이유는 이러한 차원에서 설명된다. 들뢰즈가 “펠릭스와 나는 두 사람으로서 공동작업을 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우리는 제3의 하나의 물줄기를 만들기 위해 만난 두 개의 물줄기와도 같았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개별성”이라는 것이 반드시 개인적·단독적인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언어적으로는 언제나 “나”라고 말한다. 마치 “태양이 뜬다”라는 말이 일상적인 편한 어법에 불과한 것처럼.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정확히 개인들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아무리 혼자서 글을 쓰고 있다고 믿는 경우에도 우리는 항상 이름 없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글을 쓰고 있는 셈이다.5) Gilles Deleuze, 『대담1972-1990』(Pourparlers 1972-1990), 김종호 역, 솔, 1993, <철학에 관하여> 151,152면 참조
우리가 친구와 사랑할 때 그 둘이 각각의 개인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관계맺음이 가능하겠는가? 예컨대 진화 역시 서양란은 서양란대로, 말벌은 말벌대로, 하는 식으로 개체의 능력에 의해 평행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양란과 말벌의 관계맺음 위에서 이루어지는 “되기”, “생성”의 과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 이론적인 “개체 분류법”에서 보는 것처럼 각 개체가 따로따로 나아가는 평행적 진화는 실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관계맺음 속에서 변화·생성하는 <비평행적 진화>가 있을 뿐이다. Gilles Deleuze/ Félix Guattari, 『천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2(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enie2)』, 김재인 역, 새물결, 2003, 25~27면 참조
글쓰기란 언제나 과거의 지층들 위에서 새로운 지층을 형성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책은 혼자 쓰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는 카프카, 아르또, 리만 등과 함께 책을 쓴다. 이들이 바로 <개념적 인물들> Gilles Deleuze/ Félix Guattari, 『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phie?)』, 이정임.윤정임 옮김, 현대미학사, 1999, 91~123면 “3. 개념적 인물들” 참조이다.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도 아르또의 개념을 빌려와서 활용하는 것이 아닌가? 창조란 주체나 개인 혼자서 하는 야심찬 작업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도 개인도 없다. 차라리 <사건적 개별성>이 있을 뿐이다. 책표지 위에 자기 개인의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을 통해 무엇인가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발생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둘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아주 정상적인 일이 된다. 들뢰즈는 “자신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의 주체, 하나의 인격, 자아로 여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개인은 엄격한 비개인화(비인격화) 연습을 거쳐, 자신을 온통 가로지르는 다양함, 자신 속을 헤집는 강도들을 향하여 스스로 열린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같은 강도적인 다양성의 “순간적 포착”으로서의 이름, 그것은 철학사가 강요하는 위계와 예속의 비개인화와 반대되는 것으로, 복종이 아닌 사랑의 비개인화라고 말한다.8) Gilles Deleuze, 『대담1972-1990(Pourparlers 1972-1990)』, 김종호 역, 솔, 1993, <어느 가혹한 비평가에게 보내는 편지> 30면
이것이 바로 개별성이다. 개별성은 주체도 아니고 꼭 단독적인 개인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개인일 수도 있고 둘일 수도 있으며 어떤 사건을 구성하는 집단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것이 동일자로부터 구성된 것(주체화)이 아니라, 내재적 생산성에 의해 스스로 구성하고 기능한다는 점에 있다. 이 개별자들은 각각 “특이성”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존재론적 특이성. 사건적 특이성. 이런 의미에서 존재자는 수적 단위로써가 아니라 변화와 변이체를 표현하는 “비율적 관계들”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3) 선과 개별자의 내재성
리좀 체계에서 비로소 우리는 “점”이 아니라 “선”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와 같은 위계화된 체계와 달리 지정된 점이나 위치가 없다. 따라서 리좀의 판은 홈이 패어 있지 않고 판판하고 고르다. 리좀의 판 위에는 점을 찍어놓거나 위치를 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고른판 위에서만 내재성의 선들이 속도를 내며 뻗어나갈 수 있다. 리좀에는 점들이 아니라 선들만이 있다. 선들 중에는 영토를 구획하는 분할선도 있지만 보다
맑스의 다운 다운 현대적 KH KH 철학을 철학을 현대적 맑스의 KH 중심으로 중심으로 철학을 변형-들뢰즈·가타리 변형-들뢰즈·가타리 현대적 변형-들뢰즈·가타리 맑스의 다운 중심으로
내가 하나의 선이 된다는 것은 나의 존재적 감수성에 따라, 철저히 내재성의 원칙에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야”, “남들 사는
이들이 바로 <개념적 인물들> Gilles Deleuze/ Félix Guattari, 『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phie?)』, 이정임. 맑스의 목적론과 고원 2) 리좀/ 개별성과 주체의 차이 미리 설정된 연결들만 존재하는 위계적인 나무 형태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 Gilles Deleuze/ Félix Guattari, 『천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2(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enie2)』, 김재인 역, 새물결, 2003, 25~27면 참조 글쓰기란 언제나 과거의 지층들 위에서 새로운 지층을 형성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선들 중에는 영토를 구획하는 분할선도 있지만 보다. 우리는 언어적으로는 언제나 “나”라고 말한다.5) Gilles Deleuze, 『대담1972-1990』(Pourparlers 1972-1990), 김종호 역, 솔, 1993, <철학에 관하여> 151,152면 참조 우리가 친구와 사랑할 때 그 둘이 각각의 개인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관계맺음이 가능하겠는가? 예컨대 진화 역시 서양란은 서양란대로, 말벌은 말벌대로, 하는 식으로 개체의 능력에 의해 평행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책은 혼자 쓰는 것이 아니다. 개별자의 생산성 -들뢰즈·가타리 철학- 1) 서양의 사유체계를 지배해온 <나무>유형 -초월성- 뿌리-나무 체계 어린뿌리 또는 수염뿌리 체계 리좀(rhizome) 2) 리좀/ 개별성과 주체의 차이 3) 선과 개별자의 내재성 존재적 감수성과 문화적 감수성, 자본, 주체화 개별자의 생산성, 탈영토화, 창조 4.맑스의 현대적 변형-들뢰즈·가타리 철학을 중심으로 현대적 변형을 일으킨 맑스의 사상을 분석한 리포트입니다. 들뢰즈가 “펠릭스와 나는 두 사람으로서 공동작업을 한 것이 아니다. 들뢰즈는 “자신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의 주체, 하나의 인격, 자아로 여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같은 강도적인 다양성의 “순간적 포착”으로서의 이름, 그것은 철학사가 강요하는 위계와 예속의 비개인화와 반대되는 것으로, 복종이 아닌 사랑의 비개인화라고 말한다. 다질적인 실재들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리좀의 판은 홈이 패어 있지 않고 판판하고 고르다. 서양란과 말벌의 관계맺음 위에서 이루어지는 “되기”, “생성”의 과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 차라리 <사건적 개별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정확히 개인들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오히려 개인은 엄격한 비개인화(비인격화) 연습을 거쳐, 자신을 온통 가로지르는 다양함, 자신 속을 헤집는 강도들을 향하여 스스로 열린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다양체는 연결접속을 늘림에 따라 반드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다. 이들이 바로 <개념적 인물들> Gilles Deleuze/ Félix Guattari, 『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phie?)』, 이정임.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도 아르또의 개념을 빌려와서 활용하는 것이 아닌가? 창조란 주체나 개인 혼자서 하는 야심찬 작업일 수 없다. 문제는 그것이 동일자로부터 구성된 것(주체화)이 아니라, 내재적 생산성에 의해 스스로 구성하고 기능한다는 점에 있다. 책표지 위에 자기 개인의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을 통해 무엇인가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아무리 혼자서 글을 쓰고 있다고 믿는 경우에도 우리는 항상 이름 없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글을 쓰고 있는 셈이다. 다양체는 연결접속을 늘림에 따라 반드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다. 내적 규정, 크기,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자는 수적 단위로써가 아니라 변화와 변이체를 표현하는 “비율적 관계들”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둘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아주 정상적인 일이 된다. “주체”라는 말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허상적인 것일뿐더러 질적 특이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리좀에는 점들이 아니라 선들만이 있다. 맑스의 인간관 1) 유적 존재 2) 관념론에 대항하는 니체와 맑스의 유물론 3) 전면적 인간 4) 산업적 인간 3. 맑스의 목적론과 고원 2) 리좀/ 개별성과 주체의 차이 미리 설정된 연결들만 존재하는 위계적인 나무 형태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 그것은 개인일 수도 있고 둘일 수도 있으며 어떤 사건을 구성하는 집단일 수도 있다. 맑스의 현대적 변형-들뢰즈·가타리 철학을 중심으로 다운 RF . 들뢰즈는 “자신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의 주체, 하나의 인격, 자아로 여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리좀 모양의 다양체들은 주체, 객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맑스의 현대적 변형-들뢰즈·가타리 철학을 중심으로 다운 RF . 개별성은 주체도 아니고 꼭 단독적인 개인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윤정임 옮김, 현대미학사, 1999, 91~123면 “3. 이렇게 새로운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여기에는 통일적 단위도 보편성도 필요 없다. 3) 선과 개별자의 내재성 리좀 체계에서 비로소 우리는 “점”이 아니라 “선”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개념적 인물들” 참조이다. 이론적인 “개체 분류법”에서 보는 것처럼 각 개체가 따로따로 나아가는 평행적 진화는 실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맑스의_현대적_변형12 1. 마치 “태양이 뜬다”라는 말이 일상적인 편한 어법에 불과한 것처럼.”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개별성”이라는 것이 반드시 개인적·단독적인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와 같은 위계화된 체계와 달리 지정된 점이나 위치가 없다. 들뢰즈는 카프카, 아르또, 리만 등과 함께 책을 쓴다.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도 아르또의 개념을 빌려와서 활용하는 것이 아닌가? 창조란 주체나 개인 혼자서 하는 야심찬 작업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도 개인도 없다. 맑스의 현대적 변형-들뢰즈·가타리 철학을 중심으로 다운 RF . 문제는 그것이 동일자로부터 구성된 것(주체화)이 아니라, 내재적 생산성에 의해 스스로 구성하고 기능한다는 점에 있다. 선들 중에는 영토를 구획하는 분할선도 있지만 보다. 리좀 모양의 다양체들은 주체, 객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서양란과 말벌의 관계맺음 위에서 이루어지는 “되기”, “생성”의 과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 그같은 강도적인 다양성의 “순간적 포착”으로서의 이름, 그것은 철학사가 강요하는 위계와 예속의 비개인화와 반대되는 것으로, 복종이 아닌 사랑의 비개인화라고 말한다. 맑스의_현대적_변형12 1. 들뢰즈와 가타리가 둘이서 책을 쓰는 이유는 이러한 차원에서 설명된다.. 즉, 다양체는 구체적인 질로서 존재한다.맑스의 현대적 변형-들뢰즈·가타리 철학을 중심으로 현대적 변형을 일으킨 맑스의 사상을 분석한 리포트입니다. 리좀의 판 위에는 점을 찍어놓거나 위치를 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5) Gilles Deleuze, 『대담1972-1990』(Pourparlers 1972-1990), 김종호 역, 솔, 1993, <철학에 관하여> 151,152면 참조 우리가 친구와 사랑할 때 그 둘이 각각의 개인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관계맺음이 가능하겠는가? 예컨대 진화 역시 서양란은 서양란대로, 말벌은 말벌대로, 하는 식으로 개체의 능력에 의해 평행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가 발생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들어가며 2.8) Gilles Deleuze, 『대담1972-1990(Pourparlers 1972-1990)』, 김종호 역, 솔, 1993, <어느 가혹한 비평가에게 보내는 편지> 30면 이것이 바로 개별성이다. 서로 관계맺음 속에서 변화·생성하는 <비평행적 진화>가 있을 뿐이다. 개별자의 생산성 -들뢰즈·가타리 철학- 1) 서양의 사유체계를 지배해온 <나무>유형 -초월성- 뿌리-나무 체계 어린뿌리 또는 수염뿌리 체계 리좀(rhizome) 2) 리좀/ 개별성과 주체의 차이 3) 선과 개별자의 내재성 존재적 감수성과 문화적 감수성, 자본, 주체화 개별자의 생산성, 탈영토화, 창조 4. 맑스의 현대적 변형-들뢰즈·가타리 철학을 중심으로 다운 RF .8) Gilles Deleuze, 『대담1972-1990(Pourparlers 1972-1990)』, 김종호 역, 솔, 1993, <어느 가혹한 비평가에게 보내는 편지> 30면 이것이 바로 개별성이다. Gilles Deleuze/ Félix Guattari, 『천 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2(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enie2)』, 김재인 역, 새물결, 2003, 25~27면 참조 글쓰기란 언제나 과거의 지층들 위에서 새로운 지층을 형성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존재론적 특이성. 즉, 다양체는 구체적인 질로서 존재한다. 들뢰즈는 카프카, 아르또, 리만 등과 함께 책을 쓴다. 이 고른판 위에서만 내재성의 선들이 속도를 내며 뻗어나갈 수 있다. 개별성은 주체도 아니고 꼭 단독적인 개인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책은 혼자 쓰는 것이 아니다. 맑스의 현대적 변형-들뢰즈·가타리 철학을 중심으로 다운 RF . 이 개별자들은 각각 “특이성”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개인일 수도 있고 둘일 수도 있으며 어떤 사건을 구성하는 집단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도 개인도 없다. 아무리 혼자서 글을 쓰고 있다고 믿는 경우에도 우리는 항상 이름 없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글을 쓰고 있는 셈이다. 개념적 인물들” 참조이다. 들뢰즈가 “펠릭스와 나는 두 사람으로서 공동작업을 한 것이 아니다. 질적으로, “그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맑스의 현대적 변형-들뢰즈·가타리 철학을 중심으로 다운 RF .”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개별성”이라는 것이 반드시 개인적·단독적인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맑스의 현대적 변형-들뢰즈·가타리 철학을 중심으로 다운 RF . 이 고른판 위에서만 내재성의 선들이 속도를 내며 뻗어나갈 수 있다.. 차라리 우리는 제3의 하나의 물줄기를 만들기 위해 만난 두 개의 물줄기와도 같았다. 무엇인가가 발생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마치 “태양이 뜬다”라는 말이 일상적인 편한 어법에 불과한 것처럼. 이 개별자들은 각각 “특이성”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존재론적 특이성. 차라리 우리는 제3의 하나의 물줄기를 만들기 위해 만난 두 개의 물줄기와도 같았다. 우리는 언어적으로는 언제나 “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정확히 개인들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자는 수적 단위로써가 아니라 변화와 변이체를 표현하는 “비율적 관계들”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맑스의 현대적 변형-들뢰즈·가타리 철학을 중심으로 다운 RF . 질적으로, “그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3) 선과 개별자의 내재성 리좀 체계에서 비로소 우리는 “점”이 아니라 “선”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리좀에는 점들이 아니라 선들만이 있다. 리좀의 판 위에는 점을 찍어놓거나 위치를 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맑스의 현대적 변형-들뢰즈·가타리 철학을 중심으로 다운 RF . 사건적 특이성. 이러한 관점에서 둘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아주 정상적인 일이 된다. 맑스의 인간관 1) 유적 존재 2) 관념론에 대항하는 니체와 맑스의 유물론 3) 전면적 인간 4) 산업적 인간 3.윤정임 옮김, 현대미학사, 1999, 91~123면 “3. 들어가며 2. 서로 관계맺음 속에서 변화·생성하는 <비평행적 진화>가 있을 뿐이다. 이론적인 “개체 분류법”에서 보는 것처럼 각 개체가 따로따로 나아가는 평행적 진화는 실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맑스의 현대적 변형-들뢰즈·가타리 철학을 중심으로 다운 RF . 다질적인 실재들만이 있을 뿐이다. 차라리 <사건적 개별성>이 있을 뿐이다. 맑스의 현대적 변형-들뢰즈·가타리 철학을 중심으로 다운 RF . “주체”라는 말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허상적인 것일뿐더러 질적 특이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맑스의 현대적 변형-들뢰즈·가타리 철학을 중심으로 다운 RF . 이렇게 새로운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여기에는 통일적 단위도 보편성도 필요 없다. 오히려 개인은 엄격한 비개인화(비인격화) 연습을 거쳐, 자신을 온통 가로지르는 다양함, 자신 속을 헤집는 강도들을 향하여 스스로 열린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사건적 특이성. 내적 규정, 크기,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따라서 리좀의 판은 홈이 패어 있지 않고 판판하고 고르다. 책표지 위에 자기 개인의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을 통해 무엇인가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둘이서 책을 쓰는 이유는 이러한 차원에서 설명된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와 같은 위계화된 체계와 달리 지정된 점이나 위치가 없.